부활론을 중심으로 한 비교종교학

[요약: 기독교의 전통적인 부활관과 통일교의 원리적 부활론을 비교하며 신학적 차이를 분석하였다. 기독교가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육적 부활을 신봉하며 초월적인 신성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통일교는 인간을 영육의 이성성상으로 파악하여 영적부활로 믿는다. 이러한 차이는  교리를 넘어 삼위일체와 재림관, 타종교를 대하는 포용력의 차이로 확장된다. 특히 하나님을 하늘부모님으로 인식하는 신관이 인종과 종교의 벽을 허물고 인류평화를 실현하는 열쇠가 된다. 이처럼 합리적 신앙관을 함께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원리강론 부활론 서문) 성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흙 속에 파묻혀 삭아져 버린 모든 성도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 나올 것으로 보아야 한다(살전4:16, 마27:52).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진정한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부활(復活)이라는 것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므로, 우리가 부활의 의의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 가정교회와 기독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최근에 몇몇 식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독교의 부활론과 우리의 부활론이 어떻게 다른지를 놓고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차이를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 많지 않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기독교와 우리 통일교회의 차이, 곧 비교종교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정리해 드리고 싶어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옆에 계신 식구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시겠습니다. 기독교 부활론과 통일교 부활론의 핵심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2분간 서로 말해 보십시오.)

인공지능은 아주 간단히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두고 기독교는 ‘육적 부활’이라 하고, 통일교는 ‘영적 부활’이라 합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육적부활을 믿어요 하면, 상식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며 낯설어 하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한 문장 안에 담긴 근본적인 차이를 풀어 보려 합니다.

* 영상시청: 몸의 부활(연동교회 이성희 목사)100초

1.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스스로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를 만큼, 부활에 대한 믿음이 모든 신학의 토대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부활은 ‘몸의 부활’입니다.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홀연히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된 몸은 이전의 육의 몸과는 다른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듯 육은 죽고 영이 하나님 품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육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신도 무덤도 남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죽여 버린 사건이요, 사망을 사망시킨 사건이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이 증거되었고, 죄가 없으셨기에 부활하셨으니 그 무죄함이 증명되었다. 또한 성도들이 의롭다 함을 입었음이 드러났고, 마지막 날에는 성도들도 그리스도처럼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임사체험과 부활은 다릅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면 결국 또 죽지만, 부활은 다시는 죽지 않는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 기독교가 부활을 굳게 믿는 이유

기독교가 몸의 부활을 믿는 근거는 첫째는 ‘빈 무덤’ 사건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이 사건은 기독교가 강조하는 특징이라고 봅니다. 둘째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고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부활 이후에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육적 부활이 실제로 없었다면 이 극적인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몸의 부활이 아니었다’는 반대 증거도 만만치 않게 제시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고, 잠긴 문을 통과하셨으며, 같은 몸이라기엔 너무 달랐다는 점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기독교인들은 평생 마음 한구석에서 의심을 안고 삽니다. ‘나도 죽으면 정말 부활할까?’ 그래서 기독교는 이성적 이해를 넘어선 교리를 강조하다 보니, 논리적 앎보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최우선 덕목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의 핵심을 압축한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기독교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3. ‘몸의 부활’에서 모든 초월적 신학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몸이 부활한다’는 문자주의적 신앙에서부터 기독교 신학의 여러 초월적이고 비현실적인 교리들이 파생되기 시작했습니다. 논리를 따라가 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죽는다. 예수님도 인간이다. 고로 예수님도 죽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망을 이겼다. 고로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예수님 사후 300년이 지나 교리로 확정된 삼위일체 신관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곧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십자가의 고난도 인간의 실패가 아니라 태초부터 계획된 ‘절대 예정’이어야 했고, 인간 부모의 혈통이 아닌 ‘동정녀 성령 잉태’여야만 했습니다. 또한 다시 오실 재림주 역시 인간의 몸이 아니라 하늘 구름을 타고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오셔서 죽은 자들의 육신을 무덤에서 일으켜 휴거를 시켜야 한다는 미신적이고 초월적인 종말관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 믿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독교의 모든 초월적이고 비현실적인 신학은 결국 ‘몸의 부활’이라는 한 점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아계실때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금처럼 삼위일체로 믿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말씀하실때 항상 사람의 아들, 인자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라는 표현이 4복음서에 약 80여회나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12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아로 믿었지 하나님 자신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삼위일체 신학은 예수님 사후 몸의 부활을 정당화하려다 보니 수 백 년에 걸쳐 신격화된 것입니다.

4. 그러면 우리의 부활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철저히 ‘영의 부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통일원리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정확히 알면 모든 것이 풀립니다.

모든 존재는 반드시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이라는 상대적 두 성품으로 존재합니다. 형상은 ‘제2의 성상’이며, 성상과 형상은 서로 닮아 있습니다. 둘은 구분되지만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부터 시작해서 어떤 피조물도 예외 없이 성상과 형상의 두 성품으로만 존재합니다.

양성과 음성도 이성성상으로 존재합니다. 양성 없이 음성만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서로 상대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부터 피조세계, 영계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는 절대 법칙입니다. 중성자조차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성질의 음양이 균형을 이루어 중성을 이룹니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면 마지막에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에너지(E)가 됩니다. 그런데 이 에너지에도 ‘주려는 작용’과 ‘받으려는 작용’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힘으로 나타납니다. 이 두 작용이 아예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0이 됩니다. 이 ‘주고받는 수수작용’이 곧 사랑의 작용이며, 천지를 창조한 최초의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성성상의 하나님이라는 딱딱한 철학적 표현을 인간과의 따듯한 관계적 신관으로 표현하면 ‘하늘부모님’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태초의 시작에는 ‘주고 받아 사랑하려는 관념’이라는 성상이 있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힘이라는 형상이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부터 창조가 시작되었기에 창조주가 되시고, 이 출발점이 영원히 변치 않기에 절대자요 유일자요 영원자가 되십니다. 이 하나에서 시작해 엄청난 시간을 거치며 질서와 법칙과 균형이 잡히고, 가장 좋은 환경을 갖춘 지구에서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이 차례로 질서에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영과 육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으면 육은 사라지고 영만 남으니, 형상 없이 성상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상과 형상은 영원한 원리이기에, 영인체도 지(知)·정(情)·의(意)와 신성이라는 성상, 영적인 형태라는 형상을 갖추고 존재합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절대 원리입니다.

5.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 부활’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인간이 영육으로 창조된 이성성상의 근본 원리를 체계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이 부활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유한한 몸과 영원한 영인체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태어나셔서 유한한 몸은 흙으로 돌려보내고 영원한 영인체로 완성되어 하나님께 돌아가셨다고 믿으면,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비과학적인 미신적 종교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과학과 미묘한 대립 관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6. 부활관이 다른 종교와의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라는 부활관은 다른 종교와 끝없는 갈등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자신으로 믿으면 예수님을 안 믿는 종교는 다 헛것을 믿는 종교가 됩니다. 불교의 불상을 우상숭배라며 배척하고, 이슬람의 알라를 부정하는 등 타 종교를 포용하지 못하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토착 종교를 향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안 믿으니 다 가짜’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활관으로 통일교회 참부모님을 바라보면, ‘통일교는 십자가도 안 걸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신데 왜 사람을 믿느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됐는데 문선명·한학자는 부모가 낳지 않았으니 그냥 인간이다.’ ‘예수님은 부활해 하늘로 오르셨으니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셔야 하는데, 어떻게 아기로 태어난 사람을 믿느냐.’ ‘예수님이 재림하셨다면 잘 믿던 내 몸도 이미 부활했어야 하는데 그대로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성경이 가짜란 말이냐 하며 반발하게 됩니다.

7. 하나님 아버지이냐 하늘부모님이냐

그리고 기독교에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요. 왜 하나님 어머니라는 말을 상상도 못할까요? 예수님이 아들이고 인류의 아버지라고 하지요.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은 한 분이시니 하늘어머니는 상상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양성 음성도 반드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로 존재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이성성상의 절대원리를 알았다면 독생자가 계셨으면 반드시 독생녀도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께서 재림하신 분이 참아버님이시고, 초림 독생녀로 오신 분이 참어머님이십니다. 두 분이 일체가 되셔서 비로소 참부모로 완성되셔야 하늘부모님이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하늘부모님이라는 신관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인간 자녀의 죄악때문에 더욱 아파하시는 하늘부모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또한 인류의 모든 인종이 서로 형제자매라는 인식이 비로소 뿌리내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니까 主人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엄격한 주종(主從) 관계로만 수직적으로 이해하다 보니, 역사 속 기독교 국가들이 타 인종을 지배하고 노예화하는 과오를 범할 때 신학적 제동을 걸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진화론적 인간관을 가지면 오색 인종은 그저 환경 따라 피부색이 달라진 ‘다른 인종’일 뿐입니다. ‘인간’이라는 공감대는 있어도 ‘형제자매’라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화론에서 말하듯 지배당하느냐 지배하느냐 라는 적자생존의 상대로 보게 됩니다. 이처럼 신을 어떻게 보느냐?—무신이냐, 주인으로 보느냐, 아버지로 보느냐, 부모로 보느냐—에 따라 인류가 서로 적이 되느냐, 남이 되느냐, 형제자매가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이처럼 신관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어떻게 대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부활관의 문제점에서 출발해, 우리의 원리관을 비교종교학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통일원리는 인류의 평화이상을 완성할 수 있는 최종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참부모님을 중심하고 ‘하늘부모님’을 찾아 선포했다는 것은, 이렇게 인류의 미래 자체를 바꾸는 일입니다. 이 핵심 원리를 마음에 새기셔서, 세상을 바로잡는 중심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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