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忠節은 마음의 중심이 자기가 아닌 나라와 하나님께 있느냐를 말한다. 그 가장 순결한 표상이 유관순 열사다.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그날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순국했다. 법정에서는 “일제의 재판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며 상고를 거부했고, 옥중 1주년 만세시위를 주동하다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그녀의 가문은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단일 가문 최다 기록이다. 세계인의 충과 한민족 충은 결이 다른 특징이 있다. 첫째, 가장 어두울 때 더 빛났다. 둘째, 왕·귀족이 아닌 모든 백성이 주체였다. 셋째, 5천 년간 단 한 번도 타민족을 침략하지 않은 애인의 충이다. 이러한 충효열의 특별한 심성위에 참부모님이 오셨으니, 이제 참어머님을 모시고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를 충을 넘어 聖의 서사로 완성할 때다.]
(뜻길) 최후의 문제는 지식이나 계급이 아니라 하늘이 준 환경을 사랑하고 때를 아끼는 至誠이 문제이다. 柳寬順을 보라.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민족이 충성하지 못할 때 충성했고, 충성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충성했기 때문에 민족 앞에 충성의 지표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아버님 자서전) 아버지가 덮어씌운 이불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듣던 문윤국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죽어도 나라를 위해 죽으면 복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암흑이지만, 반드시 광명한 아침이 온다”라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1.심청의 효, 춘향의 절개, 그리고 유관순열사의 忠
오늘 우리는 韓民族選民大敍事詩의 5번째 장 앞에 섰습니다. 지난 시간 심청전을 중심한 孝情, 춘향전을 중심한 節介의 문화를 가슴에 새겼습니다. 효정은 부자간의 사랑이요, 절개는 부부간의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孝가 한 가정 안에서 피는 꽃이고, 절개는 한 사람을 향한 외길이라면, 忠은 무엇입니까? 가운데 中과 마음 心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곧 마음의 중심에 따라 충신과 역적으로 나눠집니다. 자기가 중심이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라, 왕, 하나님이 중심이면 큰 가치를 위한 충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 생명을 바친 충절의 柳寬順 烈士를 만나려 합니다.
2. 유관순 열사, 그 짧고도 영원한 생애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천안시 병천면의 작은 마을에서 3남1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 집은 일찍부터 감리교 신앙을 따라 아버지 유중권 선생과 어머니 이소제 여사는 깊은 신앙 안에서 자녀를 길렀습니다.
유관순은 어릴 적부터 영민하고 통솔력이 있었습니다. 공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1916년 이화학당에 특별 장학생으로 편입했고, 1919년에는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학교에서 가장 깊이 배운 것은 영어가 아니라 ‘나라를 잃은 자의 슬픔’이었습니다. 밤마다 기숙사 한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당시 공부했던 친구들이 전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서울 거리를 뒤덮었습니다. 이화학당 교장 Lulu E. Frey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유관순과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넘어 거리로 나갔습니다. 손에는 태극기, 입에는 만세, 가슴에는 뜨거운 불을 토했습니다. 총독부는 황급히 전국의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은 ‘만세가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전국에 메아리 쳐야 한다. 충청도, 우리 마을까지 이 불을 가져가야 한다.’ 그녀는 사촌언니와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속에 감춘 채 기차에 올라 천안으로 내려갔습니다. 만 16세 소녀는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내려간 것입니다. 고향에 내려간 유관순은 잠을 잊고 인근 마을 지도자들을 만나고, 교회 목사님과 의논하며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거사 날짜는 4월1일 (음력 3월1일), 아우내 장터였습니다. 거사 전날 밤, 그녀와 가족들은 호롱불 아래서 밤새 나눠줄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4월 1일 정오, 아우내 장터에 3천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습니다. 오후 1시, 마을 어른 조인원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유관순은 장대에 큰 태극기를 매단 채 독립만세를 선창했습니다. 함성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일본 헌병대는 즉시 출동했고, 평화로운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둘렀습니다. 헌병들은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던 유관순의 옆구리를 총검으로 찌르고, 상처를 입은 유관순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갔습니다. 그 순간, 부모가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부친 유중권은 부인인 이소제와 함께 끌려가는 딸을 뒤따르며 필사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보훈처 공적 조서기록) 그날 아우내 장터에서는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30여 명이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 다음 장면이 보훈처의 공식기록에 적혀 있는 한 줄입니다.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조인원·조병호·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일본 헌병들에게 강력히 항의하였다.”
보통의 소녀라면 부모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다, 혼절하거나, 두려움으로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일제의 폭거에 항의하기 위해 다시 걸어갔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오직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유관순은 그 자리에서 주모자로서 바로 즉결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유관순은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때 함께 재판받은 모든 사람이 고등법원에 억울하여 상고했습니다. 그러나 유관순 한 사람만은 상고를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일본 법정에서 ‘나는 죄가 없다’라고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한 차원 위에서 외쳤습니다. ‘나는 너희의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며 상고를 거부한 것입니다. 위키백과는 그날 그녀의 법정 진술의 요지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점령을 규탄·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만세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료 수감자 어윤희, 이신애 등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옥중에서도 아침저녁으로 만세를 부르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3·1운동 1주년 되던 그날, 그녀는 동료 수감자들을 설득하여 옥중 만세 시위를 주동했습니다.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호응했고, 만세 소리가 형무소 담을 넘어 거리로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 만세소리를 높였기에 인근의 전차 통행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기록했습니다. 헌병대가가 출동해야 했습니다. 이 옥중 만세 주동자로서 유관순은 다시 지하 독방에 갇혀 잔혹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가혹한 고문과 영양실조, 차가운 독방에서 유관순의 몸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결혼 기념 특사로 형기가 반으로 단축되어, 출옥을 이틀 앞둔 1920년 9월 28일 오전 그녀는 서대문 형무소의 차가운 독방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만 17세였습니다.
이화학당의 미국인 교장 Walter 선교사가 시신 인도를 강력히 요구한 끝에,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조용히 치를 것’을 조건으로 유해를 인도했습니다. 10월 12일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했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훗날 일제가 이태원을 군기지로 개발하면서, 그분의 묘는 미아리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그만 실전되어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대의 기록과 추모비에 그분의 정신을 압축해 이렇게 새겼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이 문장이 유관순 본인의 직접 발언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후대가 그분의 정신을 압축해 새긴 이 한 줄이 영웅 만들기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실제 행위 자체가 일제의 재판권을 부정, 옥중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외친 만세, 그리고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를 주동한 그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관순의 충절의 꽃은 어쩌다 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한 가문 전부가 그 가시밭을 함께 걸어 준 위에 핀 꽃이었습니다.
큰오빠 유우석(1899~1968)은 1919년 4월 1일 같은 날 공주에서 만세운동을 주모하여 유관순과 같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출옥 후에도 결코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중 조국수호회를 조직했다가 퇴학당했고, 1927년 원산청년회 사건으로 징역 4년형이 다시 구형되었으며, 1934년에는 양양·강릉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는 등 평생 11번이나 일제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큰 오빠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남동생 유인석(1904~1977)은 15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일제 시대 내내 양양과 원산 등지의 탄광 갱도를 떠돌며 곡괭이를 들고 일제 강점기를 견뎠습니다.
막내 동생 유관석(1911~1944)은 여덟 살에 두 부모를 잃은 막내는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32세의 이른 나이에 1남 1녀의 어린 자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가 공식 훈·포상한 유관순 가족 및 집안의 독립유공자는 유관순 본인,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큰오빠 유우석, 작은아버지 유중무, 사촌언니 유예도, 오촌 조카 유제경, 종조할아버지 유도기, 큰올케 조화벽까지 합치면 9명입니다. 보훈처 자료의 한 줄을 그대로 가져옵시다.
“유관순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한 집안 모두 충(忠)의 길에 종족을 모두 바친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단일 가문 최다급 기록입니다.
3. 흘린 피, 그리고 세계로 퍼져 나간 함성
3·1운동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짧게나마 짚어야 할 한 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28대 대통령 Woodrow Wilson입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民族自決主義’를 발표했는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라’는 원칙입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이 원칙에 따라 우리도 스스로 일어서자’고 결심했습니다. 3·1운동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그 날의 진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19.3~5월말 약 3개월간 시위 횟수(1,542회), 참가인원(당시 인구 1,700만명중 100~200만명), 순국자(7,509명), 부상자(15,961명) 투옥자(46,948명) 전국의 감옥마다 정원의 3~6배 이상 초만원이었습니다.
단국대 사학과 김정인 교수가 정리하듯, “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 탑골공원만이 아니라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 7개 도시에서 동시에 만세시위가 일어나 전국에 퍼져나갔습니다.
3월 31일 평북 정주 — 4천 명 시위 중 28명 순국하였습니다. 1년후 정주에서 참아버님이 탄생하십니다.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 — 19명 순국
그리고 3·1운동은 한반도 안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주 서간도·북간도, 연해주, 일본 도쿄(2·8독립선언), 미국(한인자유대회) —한 민족의 함성이 동시에 5대륙에서 메아리친 사건이었습니다.
4. 한민족이 봉화를 들자, 세계가 깨어났다.
3·1운동의 함성은 한반도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중국 베이징대 학장 천두슈는 1919년 3월 23일
“고려인들의 거사를 보면서 우리 대중국을 돌아볼 때, 참으로 부끄럽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4억의 중국에서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5·4운동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5월 19일 터키 민족운동이 본격 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4월, 인도에서도 마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영국군이 평화롭게 모인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해 수백 명을 학살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후에 인도의 詩聖 Tagore(1861~1941)는 1929년 보내 준 짧은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아마도 타고르 시인은 한민족의 끊임없는 독립 의지와 3·1운동의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5. 세계의 나라사랑과 한민족 충절의 세 가지 차이
그러면 묻습니다. 나라를 사랑한 사람은 한국에만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프랑스엔 잔 다르크가 있고, 중국엔 악비가 있고, 미국엔 조지 워싱턴이 있고, 남미엔 시몬 볼리바르가 있고, 인도엔 마하트마 간디 등 어느 민족에게나 이름난 애국자는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민족의 충절은 그 결이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세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1) 첫 번째 차이 — 고난과 비례하는 충절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애국심은 ‘자기 나라가 잘 나갈 때’ 강해집니다. 올림픽 우승이나 강대국이 되면 당연히 자기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한민족은 가장 어려울 때, 나라를 잃었을 때 더 강해지는 충절이 있습니다. 빛이 있을 때 빛을 누리는 민족은 많지만,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이 되는 민족은 특별한 것입니다.
(2) 두 번째 차이 — 모든 백성이 주체가 되는 충절
세계 어디를 보아도, 한 나라의 충절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대개 왕·귀족·장군·관료들입니다. 그런데 한민족의 충절을 대표하는 이름들을 떠올려 봅시다. 논개 — 기생이었습니다. 곽재우 — 관직 없는 시골 선비였습니다. 윤봉길 — 농촌의 청년이었습니다. 학도의용군 — 총을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는 중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관순 —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한민족 충절의 주인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오직 ‘나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충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잃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백성의 충정입니다.
(3) 세 번째 차이 — 愛人의 忠節
이것이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한민족은 5천 년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타민족을 침략하거나 지배하는 데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충은 언제나 ‘우리 땅을 지키는’ 충이었지, ‘남의 땅을 빼앗는’ 충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한국 충절의 아주 특별한 차이입니다.
하늘은 인류를 한 가족으로 묶을 마지막 사명을 맡길 민족으로 ‘남을 해친 적이 없는 손’을 가진 민족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여러 민족을 지배한 힘이 넘치는 민족이었어’라고 말하는 민족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심청의 생명보다 귀한 지극한 효성, 춘향의 생명을 건 절개, 정몽주의 일편단심의 충절, 유관순의 생명을 건 충절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한민족의 독특한 심성입니다.
6. 한민족이 선민이 된 이유
이처럼 우리 한민족의 DNA는 충효열의 심성이 그 결이 좀 특별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로 정한 주인공은 유관순열사 한 분 이시지만, 사실 이름도 없이 충절을 다한 백성은 만세운동때만 살펴보아도 차고넘칩니다. 살펴본 것처럼 90일간 100~200만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7500여명이 순국하셨습니다. 전세계 독립운동사에서 참여한 숫자나 희생자는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입니다. 그냥 우리가 한민족은 하늘이 선택한 선민이니 자랑스럽지 않느냐? 참부모님께서 그렇게 선민이라 말씀하셨으니 그냥 믿고 감사하자가 아닙니다. 한민족은 건국 신화부터, 결이 다른 충효열의 심성부터 선민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자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지선열들의 희생이 헛되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의 피땀위에 지금 우리는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외견상 광복은 태평양 전쟁의 종전과 함께 급작스럽게 찾아온 것처럼 보일지라도, 만약 이러한 선지선열들의 피 어린 희생과 항쟁이 없었다면 국제사회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생명을 던진 희생에 우리 모두는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참부모님을 모시고 그들이 생명을 바치며 소망했던 참된 조국을 창건하여 그 빚을 갚아야 그 분들이 하늘나라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것입니다.
7. 옥중에 계신 참어머님과 한민족선민대서사시의 완성
그래서 그 막중한 선민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무거운, 그러나 가장 성스러운 분을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바로 다 이루시고 성화하신 참아버님과 현재 獄中의 고난을 받고 계시는 홀리마더한 참어머님이십니다. 참아버님과 참어머님은 그런 선지선열들의 값진 희생과 정성의 기대위에 하늘이 한민족을 선민으로 선택하신 그 꿈을 완성하러 보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아버님의 선조가운데에도 문익점 선생님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으신 문윤국 종조할아버님이 계십니다.
또한 어머님의 자서전 첫 장에 그날 독립만세를 외쳤던 조원모 외할머님과 등에 업혀서 만세소리를 들었던 홍순애 대모님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머님자서전) “조원모 외할머니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신앙심과 애국심이 뛰어나셨고 모든 일에 열성적이셨습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다섯살이 된 홍순애 대모님을 등에 업고 그 대열에 끼어서 만세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1945년 8.15 독립된 날 홍순애 대모님은 3살배기 참어머님을 등에 업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셨습니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처럼 그 외할머니의 그 충절과 홍순애 대모님의 충절이 곧 ‘한학자 참어머님 탄생의 정성조건’ 이었습니다. 한민족의 충절은 단순히 ‘나라를 지킨 역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깊게는 ‘참부모님의 탄생을 준비한 충절의 기대’ 였습니다. 이것이 한민족선민대서사시의 결정적 비밀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다. 한민족선민대서사시는 아직 ‘완성된 서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쓰여 지고 있는 ‘살아 있는 서사’입니다. 심청전이 효의 서사였다면, 춘향전이 절개의 서사였고, 유관순 열사가 충의 서사였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완성의 서사는 聖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성은 누가 완성시키고 계십니까? 그것은 옥중의 고난을 짊어지신 ‘Holy Mother HAN’이십니다.
지금 이 나라는 하늘이 사랑하는 조국이 안됩니다. 참조국을 찾아가야 합니다. 자, 이제 아우내 장터의 그 대한독립만세! 그 충절을 이어 받아야 합니다. 참어머님께서 “용서하라. 사랑하라. 하나되라” 하셨습니다. 마지막 선악간에 싸움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폭발시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억울함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입니다. 천심으로 외쳐 부르짖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손에는 세계 만국이 하나되는 만국기 ‘천일국의 깃발’이 들려 있습니다. 우리의 입에는 ‘참부모님! 홀리마더한 참어머님! 만세’를 외칩시다. 유관순 열사처럼 불덩어리의 뜨거운 충절을 갖고 하늘이 들으시도록, 옥중의 참어머님께 들리도록! 부르짖어 외쳐야 할 때입니다.
*유관순 열사와 참부모님의 충절의 심정으로 작성한 한편의 시입니다.
열 여섯 그 작은 가슴에 어찌 그리 큰 불이 일었더냐?
무릎 꿇고 기도할 제, 빼앗긴 산천도 함께 흐느꼈다.
손톱이 빠지고 살이 찢기어도 토해내던 그 한마디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억만세!
그 충절의 외침은 영원한 무궁화 꽃으로 피어나
한민족선민대서사시에 한 줄 한 줄 쓰이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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