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은 하나님과 피조세계가 존재하는 대원칙이요, 정분합작용과 삼대상목적과 사위기대는 사람이 살아가야 할 생활원리입니다. 잘 주고 잘 받으려면 먼저 위하여 주고, 종적인 것을 거치며, 선한 것을 대가 없이 주고받아야 합니다. 만물은 이 원리대로 저절로 살지만 인간은 배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네 존재가 서로를 위하며 살 때 사위기대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곧 하늘부모님을 모신 참가정입니다.]

*진리인지 아닌지, 가장 쉬운 잣대
죄 없는 분이 죽어야 죄인이 산다는 십자가론. 싸워야 발전한다는 변증법. 우연이 거듭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식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하늘부모님은 진리를 상식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통일원리는 누가 들어도 “아, 그렇지” 하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바로 그 점이 대단합니다.
오늘 말씀드릴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은 하나님과 피조세계가 존재하는 대원칙이고, 정분합작용과 삼대상목적과 사위기대는 사람이 살아가야 할 생활원리입니다. 한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우주의 이치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상식에 맞는지 한 대목 한 대목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 만유원력(萬有原力)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존하시는 절대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존재로 계시기 위한 근본적인 힘도 영원히 자존하는 절대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또 피조물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을 발생케 하는 힘의 근본이기도 하다. 이러한 힘의 근본 된 힘을 우리는 만유원력이라고 한다.”
오늘날 과학은 빅뱅이론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우주가 팽창해 왔다는 관측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끝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 시작을 일으켰는가. 최초의 그 힘은 어디서 왔는가.”
그렇다고 엿새 만에 천지를 지었다는 문자 그대로의 창조론이 상식에 닿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천지만물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영원히 스스로 계신 절대적인 힘, 곧 만유원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유원력! 그게 뭐예요? 그것이 하나님을 두고 한 말이에요.” 딱딱하게만 들리던 이 한마디가 실은 하나님을 가리킨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혀 준 위대한 선포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힘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심장을 뛰게 하는 그 힘도, 근원을 따라 끝까지 들어가면 가장 깊은 자리에 만유원력, 곧 하나님이 계십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 가운데 성상적인 부분이 심정이라면, 형상적인 부분이 만유원력입니다. 심정이 마음이라면 만유원력은 몸입니다. 몸과 마음이 나뉠 수 없듯 이 둘도 한 덩어리로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만유원력을 하나님만 가지신 힘으로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존재하는 모든 힘을 일으키는 뿌리입니다. 하나님이 자존하시는 힘도, 사람이 살아가는 힘도 같은 만유원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을 저 멀리 떨어진 초월자로만 보는 신관과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 수수작용(授受作用)
“모든 존재를 이루고 있는 주체와 대상이 만유원력에 의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잘 주고 잘 받으면,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 즉 생존과 번식과 작용 등을 위한 힘을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힘을 발생케 하는 작용을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수수(授受)’는 앞 글자가 줄 수(授), 뒷 글자가 받을 수(受)입니다.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것입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안 됩니다. 먼저 주는 것, 그것이 우주의 원칙입니다.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의 힘은 원인과 결과, 안과 밖, 주체와 대상의 관계입니다. 만유원력이 종적인 힘이라면 수수작용의 힘은 횡적인 힘입니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만유인력(萬有引力)과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만유인력은 원인의 힘이 아니라 결과의 힘입니다.
만유원력을 바탕으로 온 천주가 상대기준을 세워 주고받고 있습니다. 원자핵과 전자가 주고받아 원자를 이루고, 원자와 원자가 주고받아 분자를 이룹니다. 태양과 행성은 서로 주고받으며 제 궤도를 지킵니다.
꽃은 제자리를 떠날 수 없으니 향기를 풍깁니다. 그러면 벌은 그 향기를 따라, 깊은 산속 바위틈에 핀 꽃 한 송이까지 기어이 찾아갑니다. 꽃은 꿀을 주고 벌은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그것이 수수작용입니다.
우리 몸도 같습니다. 숨을 쉬며 공기를 주고받되, 호흡이 저절로 되면 건강한 사람이요 호흡이 의식되기 시작하면 병든 사람입니다.
사람 사이도 그렇습니다. “내가 저 사람한테 이만큼 해 줬는데, 저 사람은 나한테 얼마나 해 줬나.” 이 계산이 시작되는 순간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고받는 데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 잘 주고 잘 받는 네 가지 법
첫째, 먼저 위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받는 것은 자동입니다. 콩 한 알, 옥수수 한 알을 심으면 수십 배 수백 배로 거둡니다. 왜 위해야 합니까. 영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종적인 것을 거쳐서 주고받으십시오. 종적인 것을 무시하고 횡적으로만 주고받는 것, 그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셋째, 반드시 선한 것을 주고받으십시오. 사욕을 품고 주고받으면 그것은 뇌물이 됩니다. 무엇을 받을 때마다 “내가 이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하고 한 번쯤 물어보셔야 합니다.
넷째,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고받으십시오. 대가를 계산하는 순간 사랑은 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잘산다 못산다, 부자다 가난하다 하는 기준도 다시 세워야 하겠습니다. 돈과 명예가 아닙니다. 천법대로 잘 주고 잘 받으면 그가 잘사는 사람입니다. 수수법칙이 곧 황금률(黃金律)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이 바로 이 원리입니다.
*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
“만유원력으로 인하여 하나님 자체 내의 이성성상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수수작용의 힘은 번식작용을 일으키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이성성상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다.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다시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수수작용을 하면, 이것들은 다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하나님의 또 하나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정(正)으로 하여 그로부터 분립되었다가 다시 합성일체화하는 작용을 정분합작용이라고 한다.”
정분합작용은 목적을 지닌 하나의 패턴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을 건너뛰는 법이 없고 오직 같은 종으로만 이어집니다. 창세기 1장에 모든 식물과 동물을 “그 종류대로” 지으셨다 한 그대로입니다. 늑대 암수가 호랑이 새끼를 낳는 일은 없습니다.
세포 하나를 보십시오. 생명의 설계도인 DNA가 정(正)으로 들어 있고, 그것이 복제되어 둘로 나뉘었다가(分), 자라서 온전한 생명체(合)를 이룹니다. 정분합, 정분합, 정분합. 이렇게 영원히 번식하며 퍼져 나갑니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심겨 자라면 암술과 수술로 나뉘고, 수분(受粉)을 거쳐 다시 한 알의 씨앗을 맺습니다.
그러면 타락이란 무엇입니까. 이 ‘하나를 위한 둘’이 깨어져 ‘둘이 그냥 둘로’ 갈라진 상태입니다. 둘이 둘로 남으면 몸에는 병이 오고 생명에는 죽음이 옵니다. 너와 내가 둘이 되면 불화가, 사회가 둘이 되면 갈등이, 국가가 둘로 쪼개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둘이 둘로 남는 그 자리가 바로 지옥입니다. 주고받아 정분합으로 커 나가야 하는데, 수수가 안 되니 싸우는 것입니다.
* 정분합입니까, 정반합입니까
정반합이라는 도식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나왔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를 유물론과 결합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삼았습니다. 사물 안의 모순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달걀을 예로 듭니다. 껍질이 씨눈을 억압하다가, 씨눈이 자라 병아리가 되면 껍질과 투쟁하여 깨고 나와 새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십니까. 이런 것이 바로 상식을 벗어난 가짜 진리입니다.
껍질과 씨눈은 싸우기 위한 반대가 아닙니다. 껍질은 씨눈이 병아리가 될 때까지 지켜 줄 책임이 있고, 씨눈은 그 보호 속에서 정분합으로 나뉘며 자랍니다. 둘은 서로 협력하는 합목적성(合目的性)을 띠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병아리가 껍질을 깨기 전에 숨을 쉬어야 하므로, 달걀 끝에 공기주머니(氣室)까지 마련해 두셨습니다. 생명으로 나오기까지 필요한 모든 준비를 그 안에 미리 갖추어 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투쟁입니까, 사랑입니까.
다만 정반합이 힘을 얻은 배경은 헤아려야 합니다. 산업혁명 초기, 여덟 살 어린아이까지 중노동에 내몰리던 참혹한 현실이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거기에 분개하여 혁명이론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대립과 투쟁은 증오에서 나옵니다. 정반합은 진리를 밝히기보다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이론이 되었고, 그 이론을 붙잡으면 사람이 투쟁적인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투쟁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주고받아야 발전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이 논리가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는 까닭이 있습니다. 남의 행복이 곧 나의 불행이 되는 경쟁사회, 자리다툼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미움과 증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면, 통일원리는 사랑과 미를 주고받는 수수법적 유일론(授受法的 唯一論)입니다. 이제는 본연의 정분합 가치관으로 저 증오의 정반합 가치관을 벗겨 주어야 합니다.
*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正)을 중심하고 2성(二性)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과 그리고 그의 합성체(合性體)가 제각기 주체의 입장을 취할 때에는 각각 나머지 다른 것들을 대상으로 세워 삼대상기준을 조성한다. 그것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주체들을 중심으로 각각 삼대상목적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꼭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수수작용도, 정분합작용도, 삼대상목적도 다른 피조만물에게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원리법칙을 따라 생존하고 번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만유원력만 저절로 갖고 태어날 뿐, 수수작용부터는 인간이 책임분담을 해야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만물은 이 원리를 안 배워도 되지만, 인간은 배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삼대상목적이 어렵게 들리십니까. 가정에 놓고 보면 아주 쉽습니다. 남편이 주체가 되면 하나님과 아내와 자녀가 대상이고, 아내가 주체가 되면 하나님과 남편과 자녀가 대상입니다. 네 존재 가운데 하나가 주체 자리에 서면 나머지 셋이 삼대상의 자리에 섭니다. 그 삼대상을 위해 주는 목적으로 사는 것, 그것이 삼대상목적입니다.
이렇게 네 존재가 저마다 삼대상을 위하며 살면, 한 가정 안에 열두 가지 심정이 피어납니다. 하늘부모님이 남성과 여성과 그 자녀를 보시는 심정의 빛깔이 다릅니다. 남편이 느끼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아내를 향한 사랑과 자녀를 향한 부성애가 저마다 다릅니다. 아내가 느끼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남편을 향한 사랑과 모성애도 남편과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손자가 조부모님을 대하는 심정, 아버지를 대하는 심정,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도 조금씩 다릅니다. 한 지붕 아래 찬란한 열두 빛깔이 어우러지는 곳, 그곳이 가정입니다.
* 사위기대(四位基臺)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正)을 중심하고 2성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의 합성체가 각각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면 사위기대를 조성하게 된다.”
사위기대는 ① 사랑의 근본기대요 ② 선의 근본기대요 ③ 힘의 근본기대요 ④ 정분합 3단계의 근본기대요 ⑤ 3수·4수·12수의 근본기대요 ⑥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목적입니다.
그러면 사위기대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합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무엇도 가만히 멈춰 있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각도와 속도와 힘이 다르기에, 한 평면에서만 돌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가며 돕니다. 그래서 그 궤적이 공 모양, 곧 구형(球形)을 이룹니다. 태양을 도는 행성이 그렇고, 원자핵을 도는 전자가 그렇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부모님과 나, 부부 사이, 부모 자녀 사이, 형제 사이, 친구 사이, 선후배 사이에 주고받되 언제나 같은 심정으로 주고받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입체가 됩니다.
그리고 모든 수수작용에는 반드시 중심이 있습니다. 낮은 것은 보다 높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올라가고 또 올라가면 맨 위에 인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라고 합니다.
* 사위기대, 그것이 곧 참가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정의 삼요소라 하면 부모와 부부와 자녀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하나가 빠졌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늘부모님이 그 가운데 모셔져야 참가정이 됩니다. 하늘부모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부모와 부부와 자녀가 하나 되어 서로 위하며 사는 것, 그것이 참사랑의 가정이요 완성된 사위기대입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아니라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되어 버린 것, 그것이 죄입니다. 한자 죄(罪)는 그물 망(罒)에 아닐 비(非)를 더한 글자인데, 윗부분이 넉 사(四)처럼 보인다 하여 ‘사위기대가 아닌 것이 죄’라고 새기기도 합니다. 글자 모양을 빌린 풀이지만 뜻은 정확합니다.
* 그러면 왜, 기존의 종교와 사상은 가정의 위기에 답하지 못합니까
기독교인도 가정에서 행복과 안식을 찾기 원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하셨고, 에베소서 5장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여 한 몸을 이루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신학의 중심 흐름은 구원의 단위를 개인에 둡니다. “결혼하는 자도 잘 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전7:38)는 말씀은 독신을 더 높이 보는 근거로 읽혔고,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마22:30)는 말씀은 가정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쪽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가정이 행복의 안식처임을 느끼면서도 왜 개인 구원에 머물고 맙니까. 근본 원인은 신관에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초월적인 절대자이시고 남성상을 하신 오직 한 분 유일신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하나 되신 ‘하늘부모님’을 유일론으로 믿습니다. 이 차이가 현실에서는 엄청난 차이로 나타납니다. 남성상만의 유일신론으로 보면 남성은 신의 형상을 대표하고 여성은 그를 돕는 몸종과 같은 자리로 밀려납니다. 그러기에 세상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예속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신관에서는 구원도 개인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정연합은 다릅니다. 하늘부모님께서 하나 되셨듯, 남편과 아내가 하늘부모님을 닮아 하나 되는 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구원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믿음생활의 상식입니다.
불교는 어떻습니까. 가정을 떠나는 출가(出家) 수행을 가장 높은 길로 여깁니다.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겨난다는 연기론(緣起論) 위에서, 인연을 끊어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涅槃)에 이르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습니다. 가정을 완성하는 쪽이 아니라 인연을 끊는 쪽으로 향합니다.
공산주의는 아예 원리와 정반대입니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일부일처제 가족을 사유재산의 산물로 규정하고, 남성의 여성 지배를 최초의 계급 억압이라 하였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 가족이 자본과 사적 이익 위에 서 있다고 보아 그 폐지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공산세계는 가정의 행복보다 혁명과업을 앞자리에 놓습니다.
결국 가정을 해체하려던 공산사상은 무너졌고, 가정을 차선으로 미뤄 두었던 종교는 가정이 무너지는 현실 앞에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원리강론 41P』 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은 천주의 화동(和動)의 중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서로 화동하여 일체를 이룰 때 천주도 함께 화동합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된 부부로서 일체를 이룬 그 자리가 창조목적을 완성한 선(善)의 중심입니다. 또한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자리는 진리의 중심이 되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본심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하여 피조세계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를 이룬 사위기대를 중심하여 합목적적인 구형운동을 하게 됩니다.”
온 우주가 한 가정을 중심하고 어울려 돈다는 뜻입니다. 가정이 선의 중심이요, 진리의 중심이요, 본심의 중심이라는 이 말씀은 세상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실 곳이 웅장한 성전이 아니라 부부의 사랑 자리라는 이 선포가, 오늘날 가정 문제를 푸는 대안이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편재성(遍在性)
“사위기대가 하나님을 중심한 구형운동을 일으켜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운행하실 수 있는 모든 존재의, 그리고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에서는 피조물의 모든 개성체가 이와 같이 구형운동을 일으켜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은 일체의 피조물 가운데 편재하시게 되는 것이다.”
하늘부모님은 우주 어디에나 계실 수 있지만, 아무 자리에나 임재하시지는 않습니다. 사위기대가 이루어진 곳, 곧 주체와 대상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도는 그 중심에 임하십니다.
이 차이가 생활에서는 대단히 큽니다. 하늘부모님이 그저 어디에나 계신다면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나 된 자리에만 임재하신다면, 부부가 등을 돌리고 앉은 집에는 하늘부모님이 앉으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늘부모님을 모신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 모든 존재가 왜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까
첫째, 존재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이든 존재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수수작용으로만 생깁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주고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이성성상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둘째, 영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직선 운동에는 언젠가 끝이 옵니다. 영원하려면 돌아야 하고, 돌려면 주고받아야 하며, 주고받으려면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도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처럼 되풀이되는 순환으로 영원성을 지킵니다. 이것이 우주의 존재법칙이요 천도(天道)입니다.
셋째,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주고받아 하나 될 때 기쁨이 생깁니다. 그래서 상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 오늘, 딱 한 가지만
만유원력, 수수작용, 정분합작용, 삼대상목적, 사위기대. 만물이 존재하는 이치를 이토록 상식적으로 밝혀 준 진리는 다른 어느 종교와 철학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모든 종교와 철학이 이 원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천리(天理)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어떤 존재도 물리법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물리에서 어긋나는 순간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몸은 물리의 지배를 받고, 우리 마음에는 천리가 적용됩니다. 천리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해를 따라가야 사는 식물처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따라가야 사람도 자랍니다.
오늘 돌아가시거든 딱 한 가지만 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주십시오. 대가를 바라지 말고, 먼저 주십시오. 그 한 번의 ‘먼저’에서 수수작용이 일어나고, 사위기대가 세워지고, 마침내 그 자리에 하나님이 운행하십니다.
# 만유원력·수수작용·정분합·사위기대를 쉽게 풀어보기
왜 관계는 ‘먼저 주는 사람’에게서 시작될까?
사람 사이가 막힐 때 우리는 상대가 먼저 손 내밀기를 기다립니다.
내가 준 만큼 돌려받지 못했다고 느끼면 서운해지고, 더는 먼저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런데 통일원리는 관계가 움직이는 순서를 반대로 설명합니다.
받은 다음에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고 잘 받는 것.
이 작은 순서가 사람 사이뿐 아니라 가정과 공동체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렵게 들리는 만유원력, 수수작용, 정분합, 삼대상목적, 사위기대를 꽃과 벌, 씨앗과 가정의 모습으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핵심만 정리하면
만유원력은 모든 존재와 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수수작용은 주체와 대상이 잘 주고받을 때 새로운 힘이 생기는 과정입니다.
정분합은 하나에서 나뉜 둘이 관계를 맺고 더 큰 하나를 이루는 원리입니다.
삼대상목적은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고 나머지 세 대상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사위기대는 하늘부모님을 중심으로 가족이 사랑을 주고받는 터전입니다.
결국 이 모든 개념은 하나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대가를 바라기 전에 먼저 주는 것입니다.
1. 모든 존재를 움직이는 근원, 만유원력
우리의 심장은 지금도 뛰고 있고, 계절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통일원리에서는 이처럼 모든 존재가 살아가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을 만유원력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이 비슷하지만 물리학에서 말하는 만유인력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만유원력은 단순한 물리적 에너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피조세계가 존재하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근원의 힘을 의미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유원력은 모든 존재와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근원적인 힘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2. 관계에 힘이 생기는 과정, 수수작용
수수작용의 수수는 줄 수授와 받을 수受를 씁니다.
먼저 받고 나중에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고 받는다는 순서가 담겨 있습니다.
자연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꽃은 향기와 꿀을 내어주고, 벌은 꽃가루받이를 도와줍니다.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꽃은 열매를 맺고 벌은 생명을 이어갑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저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해줬을까 하고 계산하기 시작하면 관계는 점점 무거워집니다.
반대로 한 사람이 먼저 마음을 열고 따뜻한 말을 건네면, 닫혀 있던 관계에 다시 흐름이 생깁니다.
수수작용은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행동이 아닙니다.
마음과 사랑, 신뢰와 책임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갈 힘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3. 잘 주고받기 위한 네 가지 원칙
수수작용이 건강하게 이루어지려면 네 가지 원칙이 필요합니다.
첫째, 상대를 위해 먼저 줍니다.
둘째, 순간적인 감정이나 이익만 따르지 않고 하늘의 뜻과 양심이라는 중심을 지킵니다.
셋째,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것을 주고받습니다.
넷째,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 원칙이 중요합니다.
내가 이렇게 해줬으니 너도 그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은 거래가 되기 쉽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반응을 확인한 다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데서 시작됩니다.
4. 둘이 더 큰 하나를 이루는 과정, 정분합
정분합은 하나에서 둘이 나뉘고, 그 둘이 관계를 맺어 다시 하나의 결실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씨앗 한 알이 땅에 심겨 자라면 암술과 수술로 나뉩니다. 둘은 꽃가루받이를 통해 다시 새로운 씨앗을 맺습니다.
하나가 둘이 되고, 그 둘이 관계를 맺어 더 큰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부부가 완전히 똑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목적을 바라보고 도울 때, 두 사람을 넘어 새로운 가정과 사랑의 결실이 만들어집니다.
차이는 반드시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중심과 목적을 향한다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정분합은 상대를 이겨야 성장한다는 관점보다, 서로 주고받고 협력할 때 더 큰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5. 이 원리가 가정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삼대상목적이라는 말도 어렵게 들리지만 가정에 대입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가정의 한 구성원이 자신만을 중심에 두지 않고, 나머지 세 대상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삼대상목적입니다.
남편은 하늘부모님과 아내와 자녀를 위해 살고, 아내는 하늘부모님과 남편과 자녀를 위해 살아갑니다. 자녀도 하늘부모님과 부모를 사랑하며 성장합니다.
이처럼 네 자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을 주고받는 터전이 사위기대입니다.
같은 집에서 함께 산다고 저절로 참가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서로에게 내가 먼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그 중심에 하늘부모님의 사랑을 모실 때 참가정이 이루어집니다.
하늘부모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고, 부모와 자녀가 마음을 나누며 사랑으로 하나 되는 그 중심에 함께하십니다.
6. 왜 이 원리가 지금 필요할까
오늘날 우리는 상대가 먼저 바뀌기를 기다리는 데 익숙합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누가 더 많이 했는지를 계산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받기만 기다리면 관계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먼저 따뜻하게 인사해야 하고, 먼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며,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거창한 희생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가족에게 따뜻한 말을 먼저 건네는 것, 부탁받기 전에 작은 집안일을 돕는 것,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 가지만 실천해 본다면
오늘 하루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내가 이 사람에게 먼저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건넨 작은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막혀 있던 관계를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번의 먼저에서 수수작용이 시작되고, 사랑이 움직이며, 가정 안에 하늘부모님이 함께하실 자리가 마련됩니다.
어렵게 느껴졌던 만유원력과 수수작용, 정분합과 사위기대가 가리키는 생활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먼저 주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