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목적(創造目的)

(인류가 6천 년 동안 풀지 못한 질문)

[요약: 인류는 ‘나는 어디서 와서 왜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끝내 답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영광’, 이슬람은 ‘경배’라 했으나 둘 다 인간이 신에게 할 일만 물었을 뿐 신의 심정은 묻지 않았다. 철학은 근거를 대지 못했으며, 유물론은 인간을 수단으로 만들었고, 과학은 시작만 말할 뿐 원인을 몰랐다. 원리는 답한다. 창조의 목적은 영광도 경배도 아닌 ‘기쁨’이며, 전능한 하나님도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어 자신을 닮은 대상으로 인간을 지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주인이 아니라 하늘부모님이시다. 그 목적은 3대 축복(개성완성·가정완성·주관성완성)으로 구체화되고, 전체와 개체를 함께 살리는 이중목적으로 20세기의 양대 가치관 대립을 푼다. 인생의 주어도 목적어도 사랑이며, 우리는 사랑에서 와서 사랑을 완성하고 사랑의 품으로 돌아간다.]

가정연합 원리강론 창조목적

*20세기를 뒤흔든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1980년 폐수종으로 프랑스 파리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평생 ‘자유’를 외친 사람입니다. 신도 없다, 운명도 없다, 정해진 목적도 없다. 인간은 오직 스스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고통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가 소리를 지르며 절규했다고 합니다. 병문안 온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프랑스 언론이 물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토록 외쳤던 사람이, 왜 그렇게 불안해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는가?” 그때 한 독자가 신문에 이런 답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살려는 맹목적 의지’가 만든 고통이라고 믿었던 염세주의자였지요.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노인에게 공원지기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어르신,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노철학자가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요? 나도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겁니다. 인생은 저물고 있는데,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구려.”

*두 사람 다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평생 씨름해도 풀지 못한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왜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지성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조금 색다른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식구님들은 원리를 참 많이 들으셨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창조목적’ 하면 “아, 그거 3대 축복이지” 하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십니다.

귀한 진주도 매일 손에 쥐고 있으면 돌멩이처럼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창조원리를 말하기 전에 다른 답들을 먼저 보겠습니다. 세계의 큰 종교들이, 인류 최고의 철학자들이,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공산주의가, 그리고 최첨단 현대 과학이 이 질문에 뭐라고 답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답들을 다 듣고 나서 원리로 돌아오면, 매일 듣던 그 말씀이 오늘은 아주 다르게 들리실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것을 손에 쥐고 있는지 함께 실감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독교입니다. 개신교에 가장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참 좋은 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영광이 필요하셨습니까? 완전하신 분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 왜 굳이 인간을 지어서 영광을 받으려 하셨습니까? 여기서부터 기독교 신학은 애매해집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니 감히 묻지 말라” 하고 문을 닫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 언어는 ‘창조목적’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신앙의 전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땅에서의 삶은 임시 대기실이 되고, 진짜 무대는 죽어서 가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둘째,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은 이 질문에 아주 명쾌하게 답합니다. (꾸란 51장 56절) “내가 정령과 인간을 창조한 것은 오직 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라.” 목적이 분명하지요. 인간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 ‘압둘라’인데, ‘알라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종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슬람에서 ‘알라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알라는 절대적으로 초월해 계신 분이라서 인간과 부모와 자식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는 순종은 있어도 심정의 상속은 없습니다.

*셋째, 불교입니다. 불교는 아주 독특합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 자체를 해체해 버립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무아(無我)’, 곧 ‘나라고 할 것이 없다’이기 때문입니다. 사성제를 보십시오. 삶은 고통이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다. 집착을 끊으면 고통이 사라진다. 그 길이 팔정도다. 그러니까 불교가 던지는 질문은 ‘나는 어디서 왔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이 삶에서 벗어나는가’입니다. 창조주가 없으니 창조목적도 없습니다.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됩니다. 자비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지으신 인격적인 하늘부모님,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허무한 것입니다.

*자, 정리해 봅시다. 기독교는 ‘영광’이라 했고, 이슬람은 ‘경배’라 했습니다. 답이 다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통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전부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반대 방향을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동기로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왜 인간이 필요하셨는가?” 수천 년 인류 종교사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정면으로 물은 종교가 없었습니다. 인류는 신 앞에 무릎 꿇을 줄은 알았지만, 신의 가슴속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철학자, 답을 못 찾은 사람들

이제 철학으로 가 보겠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답을 찾아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리강론에서 많이 들어 보신 말 아닙니까? 인간은 창조의 수단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 그 자체라고 말입니다. 칸트가 원리의 문턱까지 온 겁니다. 그런데 딱 거기서 멈춥니다. 왜 인간이 목적입니까? 칸트는 그 근거를 대지 못합니다. “이성이 그렇게 명령하기 때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원리는 그 근거를 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카뮈시지프 신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굴러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 매일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인간. 그것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여러분, 이건 답이 아닙니다. 답을 못 찾은 사람의 절규입니다.

*유물론과 공산주의, 인간을 수단으로 만든 사상

이번에는 전혀 다른 답이 등장합니다. 마르크스입니다.

마르크스는 아예 판을 뒤집었습니다.

신 같은 건 없다. 정신이 물질을 만든 게 아니라 물질이 정신을 만든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간의 가치는 사회적 관계에서 결정된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굉장히 혁신적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20세기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말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치명적인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개인이 역사 발전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위해 개인은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생산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단이 목적 자리에 올라앉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됩니다. 인간이 수단 자리로 내려앉는 순간, 인간은 얼마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이 됩니다. 20세기 공산주의의 참극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데서 왔습니다.

유물론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에서 나왔다면 죽으면 흙으로 끝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화학반응이고, 양심은 뇌의 전기신호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도 DNA가 그렇게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물질 그 자체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유물론은 목적을 못 찾은 게 아니라, 목적이라는 질문 자체를 폐기해 버린 사상입니다.

*현대 과학과 빅뱅 우주론, ‘왜’를 모르는 학문

마지막으로 현대 과학입니다.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답으로 대접받지요.

빅뱅 우주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138억 년 전, 우주는 점 하나보다 작은 상태에서 시작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그 안에서 수소가 생기고 별이 생겼다. 별이 죽으면서 탄소와 산소와 철을 뿜어냈고, 그 잔해로 지구가 만들어졌다. 거기서 어쩌다 조건이 맞아 생명이 나왔다. 그러니까 우리 몸속의 칼슘과 철분은 실제로 옛날 별의 잔해입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남습니다. 빅뱅은 ‘시작’을 설명했지만 ‘이유’는 말해 주지 못합니다. 이건 과학의 결함이 아니라 영역의 문제입니다. 현미경으로는 어머니의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배율을 높여도 안 보입니다. 사랑은 현미경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인류가 내놓은 답들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헌신해야 하는지를 말했고, 철학은 목적을 알고 싶어 했고, 유물론은 목적을 지웠고, 과학은 시작을 말했지만 원인을 몰랐습니다. 138억 년을 연구한 과학도, 6천 년의 종교사도, 2,500년의 철학사도 이 질문에는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대전환 ─ 하나님은 ‘기쁨’을 위해 지으셨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답이 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원리강론 창조원리의 문을 열면 첫 문장부터 다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창조를 단계별로 마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기쁨)”라는 말이 여섯 번 반복됩니다. 그리고 인간 창조후 “심히 좋았더라”로 마무리됩니다. 창조목적이 ‘영광’이 아닙니다. ‘경배’도 아닙니다. ‘기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리는 인류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기쁨은 어떻게 생기는가?” 답은 이렇습니다. 기쁨은 혼자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의 성상과 형상대로 전개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에서 오는 자극을 통해 자기 자신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곧 그 대상이 자기를 닮았을 때 비로소 기쁨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화가가 머릿속에 아무리 멋진 구상을 품고 있어도, 구상만으로는 실체적인 기쁨이 없습니다. 그것이 캔버스 위에 실제 작품으로 완성되고, 그 작품에서 오는 자극이 내 마음을 닮았을 때 기쁨이 옵니다.

*이 논리를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면 엄청난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도 기쁘시려면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을 닮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못 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혼자서는 절대로 못 하시는 일이 딱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아무리 전능해도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할 상대가 필요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주를 지으셨고, 마지막에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가 왜 그분을 ‘하늘부모님’이라고 부르는지가 드러납니다. 이슬람은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고, 불교는 부를 분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아버지라 부르되 종이나 양자의 자리에서 불렀습니다. 우리는 자녀의 자리에서 ‘하늘부모님’이라 부릅니다. 이 호칭 하나에 원리 전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참아버님께서도 25세 때 깊은 기도 중에 ‘신인지관계 부자지인연(神人之關係 父子之因緣)’을 깨달으셨을 때 성경의 창조, 타락, 복귀 등 모든 의문이 확 풀렸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대전환 ─ 3대 축복, 목적이 이토록 구체적입니다

다른 종교들의 답은 어딘가 막연합니다. 영광을 드려라, 경배해라, 해탈해라, 도인이 되라. 그런데 원리는 인생의 목적을 딱 세 가지로 구체적으로 말해 줍니다. 창세기 1장 28절 “생육하라, 번성하라, 만물을 주관하라.” 이것은 원리가 새로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있던 말씀입니다. 이것이 3대 축복입니다.

*제1축복: 개성완성(個性完成)

원리는 이것을 마음과 몸이 하나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아침에 결심하고 저녁에 후회합니다. 마음은 용서하자고 하는데 입은 이미 쏘아붙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25절에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며 탄식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마음과 몸이 갈라진 상태, 이것이 고통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개성을 완성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룬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그 뜻을 알고 그대로 살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다고요.

왜 타락할 수 없습니까? 지옥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자기 것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을 울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못 합니다.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안 됩니다. 그것이 원리가 말하는 개성완성입니다. 죄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 죄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완성이라고 하면 다들 똑같아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個性’완성입니다. 하나님은 80억 명을 전부 다르게 지으셨습니다. 지문도, 홍채도, 목소리도 다 다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오직 나를 통해서만 느끼실 수 있는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니면 하나님은 그 기쁨을 영원히 느끼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하나님께는 대체 불가능한 귀한 존재이십니다.

*제2축복: 가정완성(家庭完成)

저는 이 대목이 원리에서 가장 독보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인류 종교사에 놀라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사제가 그렇고, 불교의 스님이 그렇고, 힌두교의 산야신이 그렇습니다. ‘거룩해지려면 가정을 떠나라’가 수천 년 종교사의 상식이었습니다. 가정은 세속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원리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각각 개성을 완성한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아담과 해와가 부부가 되어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적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천국의 교과서요 훈련장입니다. 결혼은 세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완성의 정점입니다.

왜 하필 가정입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네 가지 형태로만 온전히 체험됩니다. 자녀의 사랑, 형제자매의 사랑, 부부의 사랑, 그리고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 네 가지를 다 겪을 수 있는 학교는 이 세상에 가정 하나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신학교에서도, 아무리 깊은 수도원에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중에 ‘부모의 사랑’이 결정적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이 말이 신학의 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되어 보기 전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대신 아프고 싶습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부모는 끝까지 못 버립니다.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타락한 인류를 못 버리신 이유가 바로 ‘부모 심정’입니다. 부모가 되어 본 사람만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진짜 이유는 부모가 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잘난 종을 거느리고 싶으셨던 게 아니라, 심정이 통하는 자녀를 안아 보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자라서 또 부모가 되어, 하늘부모님의 심정을 무한정 전수하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이것이 심정의 상속입니다.

*제3축복: 주관성완성(主管性完成)

원리는 “하나님의 형상적 실체대상인 인간과 그의 상징적 실체대상인 피조세계가 사랑과 미를 주고받아 하나 될 때, 하나님을 중심한 주관적 사위기대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관’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관은 지배가 아닙니다. 착취도 아닙니다. 주고받아야 주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주관’하는 방식, 바로 그 방식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만물을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까? 원리의 설명이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앞으로 지으실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형상적으로 펼쳐서 만물세계를 먼저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세계를 총합한 실체상, 곧 소우주라는 겁니다.

구체적인 예를 원리강론은 실감나게 설명합니다. 지구에는 식물로 덮인 지각이 있고, 그 속에 지하수가 흐르고, 그 밑에 암층에 둘러싸인 용암층이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솜털로 덮인 피부가 있고, 근육 속에 혈관이 흐르고, 그 밑에 골격과 골수가 있습니다. 지구와 똑같은 구조입니다. 게다가 지구에 ‘오대양 육대주’가 있듯이 인간에게 ‘오장육부’가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러면 만물은 언제 그 존재가치를 얻습니까?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땅속에 묻힌 철광석은 자동차가 되고 비행기가 될 때 비로소 가치를 실현합니다. 자연의 존재가치가 인간을 통해 실현됩니다. 마치 인간이 없으면 하나님은 나타나실 방법이 없고,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가치를 가질 방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3대 축복은 왜 인간에게 축복이 됩니까?

제1축복 개성완성: 감히 인간이 하늘부모님을 닮았으니 축복입니다.

개나 호랑이는 하나님을 닮지 못했지만, 인간만이 하늘부모님을 완전히 닮아 났습니다. 그래서 축복입니다.

제2축복 가정완성: 감히 인간이 하늘부모님의 사랑을 완성할 수 있으니 축복입니다.

어떤 동식물도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3축복 주관성완성: 감히 인간이 하늘부모님 대신 천지만물을 주관할 수 있으니 축복입니다.

천지만물 대우주 가운데 인간은 시간적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사실 먼지만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하늘부모님께서는 그 인간에게 만물의 주관을 맡기셨습니다.

이러한 3대 축복을 완성한 인간은 하늘부모님의 보이는 실체가 됩니다. 그래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대전환 ─ 이중목적(二重目的)

원리강론은 모든 존재가 ‘이중목적’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전체를 위한 성상적인 목적과 자체를 위한 형상적인 목적, 두 가지를 함께 지닌 연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못 박습니다. 전체적인 목적을 떠나서 개체적인 목적이 있을 수 없고, 개체적인 목적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적인 목적도 있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 문장이 20세기 전체에 대한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20세기가 무엇으로 싸운 세기였습니까? 바로 이 두 목적관이 싸운 세기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했습니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두 가치관의 전쟁으로 수천만 명이 희생됐습니다. 그런데 원리는 그 싸움 자체가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이 둘은 원래 싸우는 관계가 아니라 상생의 관계입니다.

내 몸을 보십시오. 심장이 자기를 위해 뜁니까, 몸 전체를 위해 뜁니까? 둘 다입니다. 심장이 온몸을 위해 뛸 때 심장 자신이 가장 건강합니다. 몸이 건강해야 심장도 삽니다. 여기에는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리는 만물이 이 이중목적으로 얽힌 하나의 웅대한 유기체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행복과 전체의 평화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세계,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평화는 정치적 타협이 아닙니다. 바로 창조원리의 회복입니다.

*하늘부모님의 창조목적은 지상천국

대부분의 종교는 이 땅을 통과하는 곳으로 봅니다. 고통의 바다, 시험장, 임시 거처입니다. 진짜 무대는 죽어서 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원리는 다르게 말합니다. 창조목적이 이루어졌더라면 죄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상세계가 이 땅에 이루어졌을 것이며, 그것을 지상천국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원래 인간은 지상천국에서 살다가 육신을 벗으면 그와 동시에 자동적으로 천상천국의 생활을 하도록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자동적으로.’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죽어서 심사를 받고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살던 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떤 모습입니까? 원리강론의 정의가 멋집니다. “천국은 개성을 완성한 인간 하나의 모습을 닮은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 몸에서 마음의 명령이 중추신경을 통해 온몸에 전달되어 온 지체가 한 목적을 향해 움직이듯이, 천국에서는 하늘부모님의 사랑이 인류의 참부모를 통해 모든 자녀에게 전달되어 온 인류가 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어도 목적어도 사랑입니다

사르트르는 돌아갈 고향을 찾지 못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해가 저물도록 벤치에 앉아,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끝내 알지 못했습니다.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부모님의 사랑에서 왔습니다.

왜 삽니까?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삽니다.

어디로 갑니까?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나올 곳이 있고, 할 일이 있고,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확인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십시오.

기독교는 영광이라 했고, 우리는 기쁨이라 합니다.

이슬람은 종이라 했고, 우리는 자녀라 합니다.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나라 했고,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을 세우라 합니다.

철학은 답을 못 찾았고, 우리는 답을 받았습니다.

유물론은 인간을 수단으로 만들었고, 우리는 인간이 창조목적 그 자체라 합니다.

과학은 시작을 말했지만, 우리는 ‘왜’를 압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듣던 그 원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류가 6천 년 동안 찾아 헤매던 답지를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익숙해서 그 값을 잊고 살았습니다. 오늘 그 값을 다시 매겨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주어도 사랑이고, 목적어도 사랑이어야 합니다. 창조주께서 처음 나를 지으셨던 그 목적, 바로 그 사랑과 기쁨의 자리로 오늘 우리 모두 함께 돌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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