創造本然의 價値

創造本然의 價値

흔들리는 세상, 흔들리지 않는 가치의 기준

[요약: “그건 사람마다 다르죠.” 프로타고라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인류는 2,500년을 돌아 다시 가치의 혼란 앞에 서 있습니다. 원리는 이 물음에 분명히 답합니다. 가치는 내 마음에도, 사물에도 홀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나와 대상이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지·정·의의 주체이시며, 그 사랑이 인간의 몸을 통해 진·미·선으로 피어납니다. 주체가 주는 정적인 힘이 사랑이요, 대상이 돌려드리는 힘이 미입니다. 그러므로 예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예쁜 것이며, 하나님은 타락한 자녀조차 차마 버리지 못하십니다. 선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3대 축복을 이루는 것이고, 악은 그 중심이 사탄으로 바뀐 것입니다. 의는 선을 향해 걸어가는 삶의 작은 실천입니다. 다만 의는 뼈요 사랑은 살이니, 의로움은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야 합니다. 원리는 인류의 오랜 물음에 대한 하늘의 대답입니다. 밥상 앞에서 감사하고, 사랑의 눈으로 사람을 보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휴지 한 장을 줍는 삶 속에서 참된 가치는 완성됩니다.]

창조본연의 가치 (원리강론)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습니까? 무엇이 정말 가치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뭐라고 대답할까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죠.”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좋으면 좋은 거고, 내가 싫으면 싫은 거죠.” 이 말이 맞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은 지금 처음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들어온 말입니다. 오늘은 먼저 세상이 ‘가치’ 문제 앞에서 얼마나 헤매 왔는지 잠깐 철학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원리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보물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기준이다.” 내가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바람이 찬지 따뜻한지는 바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추우면 추운 것이고, 내가 더우면 더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치의 기준이 ‘나’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플라톤이 반발합니다. “아니다. 진짜 선은 하늘 위에 따로 있다.” 가치는 사물마다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치의 객관주의를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선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평생 풀지 못한 질문을 던집니다. “선은 하나님이 선하라 하셨기 때문에 선한가, 원래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다 하셨는가?” 앞의 것은 선은 하나님이 선하라 하셨기 때문에 선하게 된 것을 말하고, 뒤의 것은 본래 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의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이것이 인간들이 수천년간 풀지 못한 질문입니다.

*근대에 들어오면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가 나옵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쓴 책이 세 권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진(眞)’의 문제를 다룬 『순수이성 비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선(善)’의 문제를 다룬 『실천이성 비판』, 무엇이 아름다운가 하는 ‘미(美)’의 문제를 다룬 『판단력 비판』입니다. 칸트는 이를 知·意·情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누어 파고든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작업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지·의·정을 하나로 꿰는 하나님을 이성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眞·善·美를 파헤쳤지만 끝내 그 뿌리를 밝히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 니체가 등장해 외칩니다. “신은 죽었다!” 고 끔찍한 말을 했습니다. 참혹한 세상 하나님은 왜 침묵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죽었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한 니체는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20세기 전반에만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나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너진 세계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역사가 말해 준 것입니다.

전쟁 뒤에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나와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고 말합니다. 정해진 본질이 없으니 각자가 자기 가치를 만들어 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예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 진리는 없다. 모든 것은 해석일 뿐이다.” 결국 2,500년을 돌고 돌아서 프로타고라스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그건 사람마다 다르죠.”

그럼 요즘 사람들은 무엇으로 가치를 매깁니까? 시장에서는 가격으로 가치를 매깁니다. 유튜버에게는 ‘조회수’가 가치입니다. 정치권에서는 ‘지지율’이 가치를 정합니다. 사람들은 그 숫자 하나에 울고 웃습니다.

*여러분, 인류는 여기 다섯 가지 질문 앞에서 아직 확정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첫째, 창조본연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며, 그 가치의 기준은 무엇인가?

둘째, 진·선·미는 어디서 오며,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셋째, 사랑은 무엇이고,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넷째,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다섯, 의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물의 가치를 놓고 따질 때는 별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목 마른 자와 목 마르지 않은 자가 물 한 컵의 가치가 다르게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성경이냐 코란이냐, 민주사상이냐 공산사상이냐 하는 가치관의 옳고 그름의 문제로 들어가면 심각하게 갈라집니다. 여기서 전쟁이 났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원리강론 「창조본연의 가치」 장은 다섯 쪽도 안 되는 분량으로 이 다섯 가지 질문에 정확히 답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라는 원리로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다 듣고 나면 여러분 입에서 “아, 참부모님 말씀이 아니면 이 세상의 가치관 혼란은 막을 수 없겠구나!” 하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듣자마자 옳고 그름이 드러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치판단의 출발점을 바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다섯 가지 주제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째, 創造本然의 價値 결정과 그 가치의 기준

이 가치에 대해 통일원리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개성체의 창조본연의 가치는 그 자체 내에 절대적인 것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체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하고 어떠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 주체의 창조본연의 가치 추구욕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결정된다.”

여러분, 이 한 문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원리강론은 먼저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 온 일반적인 가치관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대상의 가치가, 그 대상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가치추구욕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가치의 절대 중심이 각자의 욕구입니다. 그 결과 프로타고라스는 가치가 내 마음에 달렸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플라톤은 가치가 사물 저편에 홀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치는 내 마음 안에도, 사물 안에도 홀로 있지 않습니다. 가치는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한 나와 대상의 상대적관계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수천 년 묵은 싸움이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리강론이 참인지 거짓인지 누가 판단합니까? 기독교인이 판단하면 이 책을 버릴 것이고, 우리는 이 책을 품에 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까요? 천지를 창조하신 진리의 대왕이 계시다면, 그분이 판단하셔야 참과 거짓이 깨끗이 정리됩니다. 동성애가 맞느냐 틀리느냐? 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에 도움이 되느냐, 방해가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치의 결정은 나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한 나와 대상이 상대관계를 맺어서 사위기대가 결정되어야 가치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창조본연의 가치 추구욕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창조본연의 가치추구욕’이란 내 감정이나 내 성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한 가치 추구욕을 말합니다.

*원리강론은 꽃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아침마다 해가 뜨고, 꽃이 피고, 과일이 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는 당연히 뜨는 거고, 장미는 원래 예쁜 거고, 사과는 맛있는 거야. 라며 당연하게 지나칩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늘부모님의 사랑과 정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배은망덕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온갖 정성을 들여 맛있는 요리를 해 주셨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식이 아무 감사도 없이 “이 음식은 항상 있는 거고, 찌게는 원래 맛있는 거야” 한다면 얼마나 서운하시겠습니까? 세상에 저절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군가 수고했기에 좋은 환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부모님께 항상 감사하며 살아갈 때 하늘도 인간도 만물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은 왜 혼란스럽습니까? 원리강론은 분명히 말합니다. 타락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욕망을 중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사물 자체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대상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찾는 인간의 관계 속에서 참된 가치가 태어납니다.

*둘째, 創造本然의 知·情·意와 眞·美·善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처음에 칸트 이야기를 했지요. 칸트는 진·미·선을 세 권의 책으로 나누어 연구했지만 그 근원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원리강론은 이 문제를 단 한 단락으로 풀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지·정·의의 주체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본연의 가치 실현욕에 의해 마음으로 하나님의 그 본연의 지·정·의에 감응하고, 몸으로 이것을 행동함으로써 비로소 그 행동은 창조본연의 진·미·선의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말씀처럼 하나님은 지정의의 본체이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지정의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이 지정의가 인간의 몸을 통해서 진미선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 → 인간의 마음 → 인간의 몸’이라는 질서가 생긴 것입니다. 이 세 갈래 지·정·의의 뿌리는 하늘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세 방향으로 드러나서 인간의 知를 통해 眞으로 나타난 것이고, 情을 통해 美으로 나타난 것이며, 意를 통해 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참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며, 선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걸 칸트가 몰랐기에 지정의의 연구 결과를 사랑으로 통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지·정·의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끝없이 알고 싶어 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슴이 뛰고, 옳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마음을 가졌는데, 나는 너의 몸이 없구나. 나는 네 몸안에서 살고 싶다.” 여러분, 우리 몸은 이토록 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통해 참되고, 아름답고, 선하게 나타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늘부모님과 인간을 이처럼 꼭 닮은 부자관계로 말씀하는 곳은 역사상 통일원리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신관과 인간관은 세상의 모든 난제를 푸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아주~

*셋째, 사랑과 美

세 번째 주제는 ‘사랑과 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이냐, 아름다움이 무엇이냐” 정의해 보라고 하면 아무도 그 근원을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원리강론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인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힘은 동적이요, 미의 자극은 정적이다.”

간단하지만 얼마나 명쾌합니까?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인 힘이 사랑이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이 미입니다. 천지는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서 주체와 대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시고 인간은 미의 대상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주체이고 만물은 미의 대상입니다. 이건 종적인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기에 사랑과 미가 잘 구분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종적인 주체 대상이 아니라 횡적인 주체 대상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사랑과 미가 겹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을 위해 집안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 모습이 남편에게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사랑으로 느껴집니다. 또 남편이 밖에서 열심히 일해 가족을 부양합니다. 그 모습이 아내에게는 멋지면서 동시에 사랑으로 느껴집니다. 이처럼 부부는 횡적인 주체와 대상이기에 사랑과 미가 겹쳐서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만물처럼 종적인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는 사랑과 미가 구분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원리강론은 또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윗사람의 사랑에 아랫사람이 돌리는 미를 충(忠)이라 하고,부모의 사랑에 자녀가 돌리는 미를 효(孝)라 하며, 남편의 사랑에 아내가 돌리는 미를 열(烈)이라 합니다. 여러분, 유교는 2천 년 넘게 충·효·열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왜 “충·효·열이 귀하냐?”고 물으면 “사람의 당연한 도리니까”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충·효·열이 주체의 사랑에 대한 대상의 응답이기에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유교가 2천 년 동안 강조한 덕목인데 원리는 이처럼 그 가치를 확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가 타 종교를 거부하지 않고 완성하는 방식입니다.

*사랑과 美를 놓고 여러분께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예뻐서 사랑하십니까, 사랑해서 예쁘십니까? 예뻐서 사랑하는 관계는 아름다움이 사라지면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예쁜 관계는 사랑하기에 늘 예뻐 보입니다. 그래서 미와 사랑이 아니라, 사랑과 미입니다. 화가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 버립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물 중의 최고 작품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친자식으로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을 지언정 버리지 못하시고 구원하려 애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라”고 하신 말씀을 참부모님은 축복을 통해 중생섭리를 펼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부모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차마 버리지 못해 다시 뱃속에 넣어서라도 새로 낳고 싶으신 사랑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뒤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못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해서 예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원리강론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여 자녀를 번식하면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라는 3대상의 사랑을 체휼하게 됩니다. 이 3대상 사랑의 주체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정에서 느끼는 바로 그 3대상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렇게 원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떼려야 뗄 수 없는 혈통적인 부자관계로 정립합니다. 이것이 원리가 위대한 점입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신을 인간에 비유하면 신성모독이라 정죄합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찾으러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성경을 탐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부모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찾아갑니까? 참가정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형이 가정 안에 있다는 위대한 선포입니다.

*넷째, 善과 惡

네 번째 주제는 선과 악입니다. 아까 플라톤의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선은 하나님이 선하라 하셨기 때문에 선한가, 원래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다 하셨는가?” 원리강론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사랑과 美를 잘 주고 잘 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되어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創造目的을 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善이라 하고, 사탄을 중심하고 四位基臺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배치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惡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善은 하나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정하신 명령도 아니고, 하나님과 별개로 따로 있는 선함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과 미로 하나 되어 창조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을 善이라 합니다.

*원리강론은 이 善을 창조목적인 3대 축복으로 구체화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 개성을 완성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가 善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중심한 부부가 자녀를 번식하여 참가정을 이루는 행위나 그 결과가 善입니다. 셋째, 완성한 인간이 만물을 사랑으로 주관하여 제3축복을 이루는 행위나 그 결과가 善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는 행위와 그 결과가 善이고, 사탄 중심으로 그 반대를 이루는 것이 惡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초대 교회 교부의 말씀처럼 악은 선의 결핍이 아닙니다. 중심이 ‘사탄’으로 바뀐 것이 惡입니다. 식구 여러분, 이보다 더 명확한 善惡의 기준이 있습니까? 이 기준은 세상 어느 시대나, 어느 종교인이나, 어느 인종에게도 다 통합니다. 모든 인류가 “아주” 할 수 있는 보편적인 善惡의 기준을 원리는 명확히 한 것입니다.

*1961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이 예루살렘에서 열렸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한 작가가 증인으로 섰다가, 아이히만을 바라보고는 그만 기절해 쓰러졌습니다. 훗날 그가 고백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가스실로 보냈다는 사실에 놀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보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악은 뿔 달린 괴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사탄을 중심하면 악의 실체가 되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중심하면 선한 분이 됩니다.

*다섯째, 義와 不義

마지막 다섯 번째 주제는 의와 불의입니다. 원리는 아주 짧게 설명합니다.

“善의 目的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善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義라고 하며, 惡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惡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不義라고 한다.”

여러분, 저는 이 ‘생활적인 요소’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義는 법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밥상과 길거리, 말 한마디 속에도 있습니다. 어떤 회사 사장님은 면접에서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고 사원을 뽑았다고 합니다. 면접실과 그 주변에 휴지를 떨어뜨려 두고, 그것을 주워 휴지통에 넣고 들어온 사람만 뽑은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휴지 한 장을 줍는 생활, 그런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고 회사를 발전시킬 사람입니다.

참아버님의 청년 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그때 아버님의 좌우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밥 한 끼를 드셔도 “밥아, 내가 준비하는 일의 거름이 되어 다오” 하며 드셨습니다. 학교를 남보다 더 사랑하고 싶어서 학급 청소를 혼자 도맡으셨습니다. 세탁물을 아끼기 위해 양말은 저녁에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두셨다가 다음 날 다시 신으셨습니다. 이것이 義의 생활적 요소입니다.

*그런데 義에 대해 꼭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義는 뼈와 같고 사랑은 살과 같습니다. 뼈가 없으면 몸이 서지 못하지만, 뼈가 살을 뚫고 나오면 큰 부상입니다. 사랑없이 의로움만 내세우면 그것은 인간관계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됩니다. 그래서 “義人 같은 罪人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원에서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분명 의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렇다고 다가가 심판하면 뼈가 살을 뚫고 나오는 부상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이 지나간 뒤 조용히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아지면, 공공질서가 바뀌고 언젠가는 담배꽁초를 버리던 사람도 창피해서 멈추게 됩니다. 이렇게 의에 사랑의 살로 덮어 주는 것입니다.

*원리는 인류의 질문에 대한 하늘의 대답입니다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 이제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만났던 철학자들을 한 분씩 다시 불러 보겠습니다.

프로타고라스에게 원리는 대답합니다. “人間이 萬物의 尺度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인간이 참된 기준이 됩니다.”

플라톤에게 원리는 대답합니다. “價値는 저 하늘 위에 홀로 있다.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이 사랑으로 하나 될 때 가치는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創造目的을 성취하는 것이 善입니다.”

칸트에게 원리는 대답합니다. “眞·美·善은 세 조각이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知·情·意의 근원이며, 인간을 통해 진·미·선으로 피어난 꽃입니다.”

니체에게 원리는 대답합니다. “神은 죽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식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낳고 싶어 애태우시는 살아 계신 하늘부모님 이십니다.”

사르트르에게 원리는 대답합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아닙니다. 개성완성, 가정완성, 주관성완성의 3대 축복을 완성한 인간이 본질을 완성한 실존체입니다.”

식구 여러분, 이것이 통일원리입니다. 모든 가치관을 하나로 꿰어 완성하는 바늘과 실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매일 수고하며 행복을 이루려고 애쓰고 있지만 물밑에서 심각하게 벌어지는 가치관 전쟁에서 무너지면 전쟁이 올 수 있으며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는 매일 갈등과 전쟁이 끊이질 않지만 결국 그 시작은 가치관문제로 시작됩니다. 이것을 누가 무엇으로 풀어냅니까? 오늘 철학적 난문제와 그 해답을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진리의 참 빛이 드러났습니다. 빛은 어둠은 밀어내고 밝은 희망찬 세상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참부모님의 말씀이 아니면 이 세계는 가치관의 혼란을 극복할 수 없다. 아주~

*이번 한 주간 이렇게 살아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첫째, 밥상과 꽃 앞에서 “하늘부모님, 감사합니다” 하십시오.

둘째, 무엇을 하기 전에 知·情·意 마음의 명령을 따르십시오.

셋째, 사랑해서 예쁜 눈으로 가족과 타인을 바라보십시오.

넷째, 행동할 때 “나를 위한 것인가, 하늘과 남을 위한 것인가?” 물어보십시오.

다섯째, 생활속에서 휴지 한 장을 줍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십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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