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선민대서사시와 하늘부모님 성회

20260405 한민족선민대서사시와 하늘부모님성회

참부모님 말씀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참아버님 말씀, 85.12.11) 한민족의 시련은 이 민족 자체만의 것이 아니고 섭리적인 것이며, 하나님은 이 민족이 이것을 극복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세계사의 총합적 유산이라 일컬을 수 있는 동과 서, 남과 북, 정신과 물질, 유심과 유물의 대결과 혼돈이 집약되어 한반도에서 소용돌이치는 것도 마치 새 시대를 잉태한 산모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입니다. 한민족의 민족적 국가적 어려움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떠나서는 해결할 수 없으며, 한국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결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참아버님 자서전 중)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려면 끊임없이 자기를 다스려야 합니다. 제 속이 다 곪아터진 다음에야 비로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법인데 우리 민족이 바로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핍박받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장 가깝습니다.

(참어머님 자서전 중) 나는 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을 가끔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우리 한민족을 역사적으로 어렵고 힘든 고비마다 보호해 주셨을까? 생각해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는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선민으로 택한 한민족 가운데 인류의 메시아 참부모로 오신 독생자와 독생녀를 지키셔야 했으며, 이를 위한 유엔의 참전은 하늘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왜 어머님은 “한민족선민대서사시를 교육하라”고 반복하시는가

여러분, 지금 참어머님께서 옥중에서 면회 오는 식구들에게 항상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한민족선민대서사시를 전 국민에게 교육해야 한다.” 면회 올 때마다 이 말씀을 하십니다.

솔직히 우리가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 그 말씀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보통이라면 법적인 해결 방법을 말씀하시거나, 현 정부의 잘못된 사법적 판단을 문제 삼으시거나, 시위를 하라고 하실 수 있는데요. 그런 말씀은 일절 없으십니다. 오직 한 가지, “한민족이 선민임을 알게 해야 한다.” 면회 오는 지도자 누구에게나 똑같은 이 말씀만 반복하고 계십니다.

도대체 이 말씀 속에는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걸까요?

어머님이 가장 염려하시는 것

저는 이렇게 느낍니다. 어머님께서는 한민족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대단히 염려하고 계신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 채 엉뚱한 길로 빠져도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겁니다. 길을 잃은 줄도 모르고 헤매는 것이죠.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 한민족은 참부모님을 맞이하여 전 세계를 구원할 숙명을 가진 민족이다. 이것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민이란 무엇인가 — 잘못된 선민관을 바로잡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꼭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선민’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하늘의 축복을 받은 자랑스러운 민족, 잘난 백성’이라고 생각하시진 않으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오늘 처음에 훈독한 말씀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선민이란, 세계를 구하는 책임을 위해 희생과 고난을 겪고 이겨낸 민족, 하늘이 직접 선택하시고 길러내신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민족만을 위한 선민은 교만에 빠져 하늘의 섭리를 그르칩니다.

이스라엘의 교훈 — 교만한 선민이 섭리를 망쳤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선민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만을 위해 축복해 주셨다’는 교만한 선민의식에 빠진 겁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방 민족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교만한 선민이 되어 버린 것이죠. 그래서 결국 섭리를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위풍당당하게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강력한 지도자. 모세보다 더 능력 있고, 엘리야나 솔로몬 왕보다 월등한 슈퍼스타. 이방 민족을 멸하고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해 줄 영웅. 이런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 분이 나타나셨습니까? 베들레헴 시골 동네 출신, 서른 살 총각 한 분이 나타나신 겁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어부요 세리였습니다. 모세 율법을 거역하는 것처럼 보였고,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모나 처자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여러분, 이게 얼마나 혁명적인 선포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당시의 정의였습니다. 원수 로마에게 짓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그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지금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이나 이란에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한 대 맞으면 열 대로 갚아줍니다. 그런 민족에게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시대 그 상황 속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선포였던 것입니다.

An elderly Jewish man in a prayer shawl looks on as three crosses stand atop a distant hill.
An elderly man in traditional Jewish attire stands solemnly on a rocky hill, with three crosses visible in the distant background.

왼편 강도의 조롱, 그리고 오늘의 조롱

결국 예수님은 종교재판과 정치재판을 연이어 받으시고, 십자가 사형틀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형. 이것은 하늘의 가장 큰 저주를 받은 죄인을 처형할 때만 쓰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달린 왼편 강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나와 당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봐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면, 당신 아버지가 어찌 당신을 이렇게 그냥 내버려 두시겠느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 진짜 아들이면 왜 살려주지 않겠어.’ 이렇게 조롱한 것이죠.

여러분, 이 장면이 지금 참어머님의 처지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어머님을 향해 뭐라고 합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독생녀라고? 웃기지 마라. 그런데 왜 감옥에서 구해주지도 못하느냐. 최측근이 배신하고, 눈도 안 보이고, 걷지도 못하고, 심장병까지 있으면서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사람이 누굴 구원한다는 거냐. 당신이나 하나님한테 구해 달라고 해 보시지.” 이렇게 조롱하는 것이죠.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세상의 메시아관 vs. 하늘부모님의 바라심

세상 사람들이 메시아를, 구세주를, 재림주를 바라보는 눈이 하늘부모님의 바라심과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은 모세처럼, 다윗왕처럼, 엘리야처럼 대단한 선지자, 귀신도 잡고 세상 권력도 굴복시키는 초능력의 강력한 지도자를 기대합니다. 사람의 형체조차 우리와는 다를 것이라 상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참아버님도, 참어머님도 외적인 모습은 우리 인간과 너무나 똑같으셨습니다. 다른 것은 오직 내면입니다. 하늘부모님과의 일심 일체 일념 일화. 인간을 향한 사랑. 그리고 말씀.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려면 영적 감각이 남다르거나, 함께 생활해 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내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하늘부모님을 닮은 내적 실체로 오셔서, 인간의 내적인 병폐를 고치시고, 하늘부모님 이상의 나라를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상이 바뀌는 것은 나라가 말씀에 따라 바뀌고, 법이 바뀌어야 비로소 서서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보이는 것, 외적인 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메시아관이 하늘부모님의 바라심과 근본적으로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오신 메시아 재림주님, 독생녀께서 가시는 길이 이토록 험난한 것입니다.

진정한 선민이란

그래서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선민이란 하늘의 축복을 받아 제 잘난 맛에 사는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란, 고난 속에서 이겨낸 강인한 민족이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민족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민족이 될 바탕을 가진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신 참부모님을 올바로 맞이하여, 하나님의 꿈을 중심삼고 세상의 구원 사역을 완성시킬 참다운 백성. 그것이 바로 선민입니다.

한민족이 바로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하늘부모님께서 그렇게 길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그 정체성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선민으로서의 심성, 그 마음의 바탕은 하늘부모님과 우리 조상들이 그래도 잘 길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기독교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어떻게 사명을 놓쳤는가

먼저 성경의 핵심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구약의 약속, 즉 ‘오래된 약속(舊約)’이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에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하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오신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하신 약속이 바로 신약(新約)의 말씀입니다. 신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내가 다시 오리라.” 이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그래서 신약 말씀의 30%가 직간접적으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 처녀의 등잔불 비유,  “인자도 너희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리라”,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때를 분간하라” — 잔치의 비유, 제자 되는 길의 비유, 재난의 징조, 포도원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요한 계시록은 전체가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자가 바로 정통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에 간절하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시작과 끝이 달라진 것이고, 성경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쪽이 이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를 보십시오. 재림에 대한 신앙의 형태만 있지, 기다림이나 간절함이 거의 없습니다. 시작과 끝이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뜨거웠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기독교는 재림주를 기다리는 뜨거운 신앙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제시대 한국 기독교는 정말로 신령했습니다.

얼마나 뜨거웠느냐면요. 미국의 루비 켄드릭이라는 어린 여성 선교사가 1907년에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개성에서 복음을 전하며 헌신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에 온 지 불과 9개월 만에 급성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부모님께 보낸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만약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외국에서 온 선교사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신앙은 그토록 순수하고, 신령하고, 뜨거웠던 것입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신앙심이 대단했습니다.

인공지능에 물어보면 194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신앙심이 뜨거웠던 1등 나라가 한국이었고, 재림주를 가장 갈망했던 나라도 한국이 세계 1등으로 가장 많은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전 세계 1위에서 60위 가운데 무려 14명이 한국인입니다. 그만큼 한국의 재림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김백문), 새벽회(이용도), 천부교(박태선), 용문산기도원(나운몽), 원산그룹(백남주), 영생교(조희성), 신천지(이만희), 하나님의교회(안상홍·장길자), 삼각산기도원(정득은), 성주교(김성도), 복중교(허호빈), 통일교(참부모), 증산교(강증산), 대종교(나철), 원불교(박중빈)…

하늘부모님께서는 이처럼 신령한 그룹들을 통해 사람들의 심령과 지능을 높이시고, 재림을 위한 정성의 토대를 쌓아 오신 겁니다. 비록 그들이 참된 메시아가 아니었더라도, 구세주를 열망하는 그 정성이 모이고 쌓여서 참부모님을 맞이하기 위한 기대를 만들어 오신 것입니다. 바로 그 정성의 토대 위에서 드디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참부모님이 탄생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님께서는 그들의 기반을 이어받아 재림의 목적을 이루셔야 했기에, 직접 김백문, 이용도, 김성도, 허호빈을 찾아가시며 정성을 드리셨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받아 주지 않아 고난의 길을 걸으실 수밖에 없으셨지만, 그 정성의 뿌리는 참부모님께로 연결되어 온 것입니다.

기독교가 재림의 열망을 꺼뜨렸다

그런데 기독교가 어떻게 했습니까? 재림을 열망하는 모든 신령한 종단의 지도자들을 핍박하고, 이단이라 정죄하고,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기독교에서 신령이 사라져 버렸고, 재림의 열망이 차갑게 식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소망, 그 끝이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참부모님께서 기독교로부터 배척받게 된 진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믿으면서, 정작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지금 참어머님께 쏟아내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믿겠다.” 이 말과 지금 기독교인들이 하는 말이 뭐가 다릅니까?

그러니까 2천 년 전의 바리새인이 바로 지금의 기독교인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3장)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어머님의 진정한 염려

지금 한국이 바로 이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당신의 고통보다 바로 이것을 가장 염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선민이 책임을 다하지 못해 나라를 잃고 2천 년을 방황했던 유대 민족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기에, 면회 오는 모든 분들에게 한민족선민대서사시를 교육하라고, 선민의 책임과 사명을 가르쳐야 한다고 그토록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선민은 누구인가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내적인 선민은 과연 누구입니까?

바로 전 세계의 축복가정, 우리들입니다. 선민은 참부모님을 모시고 알리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민된 자의 사명입니다.

마무리 — 대서사시의 마지막 장은 우리가 쓴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민족선민대서사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참어머님의 자서전도 여전히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장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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